내가 사랑하는 사람

시집
비제 출판사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저)』를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본 정보
저자
** 정호승(1950.01.03 ~ ) **
경희대 국문학과 학/석사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등단 1989년 소월시문학상 2000년 정지용 문학상 2006년 한국가톨릭문학상 2009년 지리산 문학상 2011년 공초문학상
주요 사적
『내가 사랑하는 사람』(2003, 2014, 2021)
내용
정호승 시선집
좋아하는 시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시인예수」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
새벽의 사람
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고요한 기다림의 아들
절벽 위에 기을 내어
길을 걸으면
그는 언제나 길 위의 길
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
사람의 바람
들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용서하는 들녘의 노을 끝
사람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워하는
아름다움의 깊이
날마다 사랑의 바닷가를 거닐며
절망의 물고기를 잡아먹는 그는
이 세상 햇빛이 굳어지기 전에
홀로 켠 인간의 등불
「폭풍」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을 두려워하며
폭풍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저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나는
저 한 마리 새를 보라
은사시나뭇잎 사이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 깊어 갈지라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에 핀
한 송이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삶」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이 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릴 때가 있다
밤이 지나지 않고 새벽이 올 때
어머니를 땅에 묻고 산을 내려올 때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모든 증오일 때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린다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믈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내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바닥에 대하여」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불면」
이 세상에 꽃이 피는 건
죽어서 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까닭이다
그래도 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는 건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 꽃이 있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녕 그렇지 않다면
왜 꽃이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고
왜 사람들이 가끔 꽃에 물을 주는가
그러나 나는 평생 잠을 이루지 못한다
왜 꽃처럼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마다
짐승이 한마리씩 들어앉아 있는지
왜 개 같은 짐승의 마음속에도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이 들어앉아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평생 불면의 밤을 보내는
한마리 짐승이다
「벽」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불빛」
때때로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처음엔 어두운 터널 끝에서 차차 밝아오다가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확 밝아오는 불빛처럼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특히 어두운 과거의 불행에 환하게 불이 켜져
온 언덕을 뒤덮은 복숭아꽃처럼 불행이 눈부실 때가 있다
봄밤의 거리에 내걸린 초파일 연등처럼
내 과거의 불행에 붉은 등불이 걸릴 때
그 등불에 눈물의 달빛이 반짝일 때
나는 밤의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인다
멀리 수평선을 오가는 배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등대가 환히 불을 밝히는 것처럼
오늘내 과거의 불행의 등불이 빛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살아갈수록 후회해야 할 일보다 감사해야 할 일이 더 많아
언젠가 만났던 과거불(過去佛)의 미소인가
불행의 등불을 들고 길을 걸으면 인생이 다 환하다
「묵사발」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첫눈 내린 겨울산을 홀로 내려와
먹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묵사발이 있어야 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비로소
나를 묵사발로 만든 이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나는 묵을 만들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묵사발이 없었다면 묵은 온유의 형태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 또한 순하고 연한 묵의
겸손의 미덕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은 묵이 될 수 있었다
굴참나무에 어리던 햇살과 새소리가 묵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 쓸쓸함에 대하여」
당신은 사랑은 기억하지 못해도
분노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기도는 기억하지 못해도
증오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ㆍㆍㆍ
「시간에게」
무엇을 사랑했느냐고 묻지 마시게
누구를 사랑했느냐고 묻지 마시게
사랑할수록 무슨 할 말이 남아 있겠는가
밥이 눈물이 될 때까지 열심히 살았을 뿐
이미 길을 잃고 저만치 혼자 울고 있다네
밤이 깊어가도 해가 지지 않아
아침이 찾아와도 별이 지지 않아
혼자 기다리다가 울 때가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사랑했느냐고 묻지 마시게
진실 또한 침묵 속에서 혼자 울고 있다네
무엇을 사랑하고 인생을 잃었는지
거짓 속에도 진정 사랑은 있었는지
사랑이 증오를 낳고 증오가 사랑을 낳았는지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미움과 증오가 필요하고 가치가 있었는지
묻지 마시게 부디
사랑할수록 사랑을 잃은 내가
무슨 인생의 길이 될 수 있겠는가
「새벽별」
새벽별 중에서
가장 맑고 밝은 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새벽별 중에서
가장 어둡고 슬픈 별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후기
정호승 시인의 삶을 녹여낸 자서전
고등학생 때 교과서에서 「슬픔이 기쁨에게」 시를 처음 읽고 느꼈던 충격과 전율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시를 외우지도 못하고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시를 생각하면 항상 1순위로 떠오르는 제목이자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이며, 내 영혼을 단숨에 사로잡아 가치관 형성에 강력하게 개입한 작품이었다.
이 시집을 선택하면서,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엇을 느꼈는지 정말 궁금했다. 창작 연도별로 묶어진 듯한 챕터별로 읽어나간 끝에, 시인의 초년의 기도와 사랑의 불꽃이 세월과 사회의 풍파에 꺾여 방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부 - 슬퍼함으로써 희망을 버리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는 칼을 들며, 모든 것과 서로를 사랑하자
2부 - 민주화 운동에 대한 슬픔과 자유를 향한 열망, 분단 상황의 해결에 대한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
3부 - 사랑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노래. 죽은 사랑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 사랑함으로써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증오, 허망, 절망, 슬픔, 기다림, 그리움, 외로움, 이해, 평화, 기쁨)과 아름다움. 사랑은 각자의 삶을 따로 평행선을 그리며 살아가면서도 같이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는 것
4부 - 일상 속에서 시인이 그때그때 느낀 소회
5부 - 마음의 방황과 나를 미워하고 용서하는 것에 대하여
6부 - 자아 성찰과 감사, 삶의 방향 및 의지 다지기
7부 - 노년이 된 시인의 근황
「슬픔이 기쁨에게」에서 슬픔의 힘을 이야기하며 사랑을 노래하던 젊은 시인은, 「그 쓸쓸함에 대하여」에서 사랑과 기도보다 분노와 증오에 압도되어 「시간에게」에서 사랑을 잃고 방황하고 있음을 고백하며 「새벽별」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어둡고 슬픈 별’이라며 자신의 삶을 자조하고 비관하고 있다.
책을 덮으면서, 저 독백이 미래의 나의 모습이 될까 두렵고 겁이 났다. 내가 사랑했던, 슬픔조차도 사랑으로 승화하며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7부에서는 허무와 자조로 점철되어 있었다. 사람이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뚝심있고 아름답게 삶을 지속해가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왜 나의 새벽별은 추락했는가. 누구에게나 삶은 쉽지 않다. 생각컨대 시인의 삶이란 사회나 사람을 관찰하고 시를 쓰고 글을 기고하거나 강단에 서는 데 있는데, 그들은 나름대로 사랑하고 함께 슬퍼하며 사회에 기여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관찰자에 불과한 이론가들이다. 그래서 현실에 직접 부딪힐 일이 거의 없으니까 실제로 맞닥뜨리면 더 마음이 쉽게 꺾이고 부러지는 거 아닐까.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써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부디 용기내서, 다시 한번 사랑하세요.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고 그를 닮고자 하던 당신에게, 무명의 독자가,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