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미데스

플라톤, 절제
아카넷의 『카르미데스(플라톤 저, 유혁 역)』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본 정보
저자
플라톤 (BC428/427 or BC 424/423 ~ BC348/347)
아테네 출생, 아리스톤과 페릭티오네의 아들
외가쪽이 솔론의 6대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고등 교육 기관 ‘아카데메이아’의 교육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적
I.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II. 『크라튈로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트』, 『정치가』
III. 『파르메니데스』, 『필레보스』, 『향연』, 『파이드로스』
IV. 『알키비아데스 1』
V. 『카르미데스』, 『라케스』, 『뤼시스』
VI. 『에우튀데모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메논』
VII. 『대 히피아스』, 『소 히피아스』, 『이온』, 『메넥세노스』
VIII. 『클레이토폰』, 『국가』,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IX. 『미노스』, 『법률』, 『편지들』
내용
포테이다이아 전투(BC429)에서 돌아온 소크라테스가 레슬링 경기장에서 크리티아스 및 그의 사촌 카르미데스와 절제란 무엇인지 나눈 대화
후기
후대 교육의 중요성
이 책은 절제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소크라테스가 카르미데스와 크리티아스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표면적으로 이 책의 주제는 절제의 정의에 대해 탐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등장인물들의 주장과 근거를 스스로 논박해가며 절제란 과연 무엇인지 논의하는 것도 우리의 가치관 정립과 사고 함양에 이로운 행위일 것이다. 절제라는 키워드 외에도, 이 책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름다움이란 항상 절대적인 미덕인가? 앎이란 결국 무엇인가?
그러나 이 책을 덮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왜 카르미데스를 이 대화편의 제목으로 삼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책의 제목은 해당 이야기의 주제와 흐름을, 작가가 스스로의 언어로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글귀이다. 왜 플라톤은 가장 많은 토의를 했던 크리티아스가 아니라 카르미데스를 선택했을까? 나는 카르미데스가 그 시대 아테네를 이끌 청년 세대를 대표하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어느 국가던지 기성새대와 더불어 미래를 이끌 세대가 번영과 쇠락을 좌우할 주체이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가장 플라톤의 입장과 비슷하고, 일견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포테이다이아 전투에 참전하여 민주정 시민으로서의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도시에 막 귀환한 참이었다. 보통 고향에 오랜만에 귀환하면 가족의 안부와 같이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을 먼저 돌보게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인들과의 안부를 나눈 다음,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함과 관련해서 지금 사정이 어떠한지, 또 젊은이들과 관련해서 그들 가운데에 누군가가 지혜로 보나 또는 아름다움으로 보나 아니면 둘 모두를 보더라도 뛰어난 자들로 성장했는지를 물었다”1. 즉, 소크라테스의 최우선 관심사는 현 아테네 시민과 미래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지혜를 사랑함”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글라우콘의 아들이자 사촌인 카르미데스를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자”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소개를 받는다. 그는 기성 세대에서뿐만 아니라 청년 세대에서도 아름다운 외모로 추앙받고 있었는데, “많은 다른 연인들이 그 뒤를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에도 뒤쫓아 오고” 있었고, “소년들에게도 관심을 돌려 보고서,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가장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고, 도리어 모두가 마치 조각상을 우러러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의 영혼의 본성이 아름답고 훌륭함을 “그 외모에 앞서 주시하지 않은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책의 배경이 되었던 아테네의 시민들이 외양의 아름다움을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영혼의 좋은 본성보다도 주시하고 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크리티아스의 말대로 카르미데스는 외모뿐만 아니라 지혜를 사랑함도 갖춘 자인가?
소크라테스는 크리티아스의 소개로 카르미데스와 만나, 아침에 머리가 무거운 증상이 있다는 그에게, 트라케에서 온 잘목시스의 의사에게서 배운 약과 주문을 이야기하며, 주문을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카르미데스가 절제를 지니고 있는지 함께 검토하기로 합의한다. 카르미데스는 절제를 “모든 것을 조화롭게 그리고 조용하게 행함”이라고 말하지만, 절제란 아름다운 것이라는 대전제에 동의하고 민첩하고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이 느리고 조용하게 이루어지는 것보다 아름답다는 경우들에 동의하면서, 절제가 일종의 조용함이 아닐 것으로 최종적으로 합의한다. 이후 카르미데스는 다시 “절제는 사람이 부끄러워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염치”라고 대답하지만, “염치는 곤궁한 사람이 곁에 두기에 훌륭하지 않다”는 호메로스의 인용구의 권위에 별다른 반박없이 납득하면서, 절제는 아름다우며 훌륭하기 때문에 절제는 염치가 아님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크리티아스는 “절제는 자신에게 속한 것을 행함”을 검토하길 청하면서 논의에서 퇴장하는 동시에, 주장의 출처였던 크리티아스에게 논의를 넘긴다. 여기서 우리는 카르미데스가 지혜를 사랑한다고 자칭하기에는 아직 미숙하며, 자신의 판단과 행위를 스스로 정하지 않고 사촌이자 후견자인 크리티에스에게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크리티아스의 기나긴 토의 끝에 절제의 정의를 찾지 못한 채 대화가 끝나자, 카르미데스는 “두 분조차도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여전히 자신은 소크라테스의 주문이 필요하므로, 필요하다면 크리티아스의 명령에 따라 폭력을 불사하겠다는 예고를 한다. 크리티아스 또한 아름답고 이로우며 좋은 것만에 자신에게 고유하며, 해로운 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므로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행하는 사람은 절제있다는 논리를 펴면서 스스로의 행위 모두를 주관적으로 정당화한다. 동시에 그는 소크라테스가 주문을 외도록 하면 카르미데스가 절제 있다는 증거라며 소크라테스가 주문을 외도록 행하게 하라는 명령을 사촌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리며 자기 편의적인 논리와 지시에 익숙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BC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한 이후 친 스파르타 과두정권인 30인 과두정에서 주역으로 활약한다. 30인 과두정은 공포 정치를 통해 부유층과 대립 세력을 숙청하고, 재산을 강탈하여 민주정 지지 세력의 반발을 샀고, 1년 뒤인 BC403년에 내전으로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 모두 사망한다. 플라톤은 20년 전의 대화편을 설정하여 절제라는 주제를 둘러싼 둘의 대화와 행동을 보여주면서 둘의 성향을 보여줌으로써, 실제 사회에서의 족적 또한 익히 알았을 그 당시의 독자층인 아테네 시민들에게 외면이 아닌 영혼의 덕을 쌓도록 권장함과 동시에 사회의 교육에 의한 영혼의 발전없이 20년 전과 비슷하게 성장한 카르미데스를 조명함으로써 후대 교육의 방향과 그 중요성을 처절하게 인식시키고자 의도했다는 것이 이번 독서의 결론이다.
미래 세대 교육의 중대함은 21세기의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사 중 하나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여전하며, 자본주의라는 사회 이념이 추가되면서 돈으로 사고를 무마하며 승승장구하는 사례 또한 왕왕 목격할 수 있다. 물론 돈은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 외모도 아름다울수록 좋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벌고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로 얼마의 수익을 냈으며, 얼마를 들여 어딘가 여행하거나 먹었는지 끊임없이 말하고 SNS에 공유하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만, 연예인이 아닌 이상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떻고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학교는 인성 교육의 장이라기보다는 공공 보육 장소에 가깝게 전락했고, 학생들은 대입 입시라는 획일적인 목표 아래 내신과 수능 공부가 최우선 가치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할아버지 세대는 참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며 어떻게든 자식들을 공부시켰고, 성장한 아버지 세대는 빛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함과 동시에 도덕적 해이와 천민 자본주의의 굴레에 빠졌다. 그리고 아버지 세대의 부의 정도에 따라 삶의 질이 상당히 좌우되는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세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의 자식 세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브랜드와 가치에 따라 노는 그룹이 나뉜다는 말이 파다하게 돌고 있다. 고대 아테네의 역사로부터 2000여년을 뛰어넘어, 역사는 다시 반복되려는가?
OCT 153d ↩︎